신라말 최치원(崔致遠.857~?)의 저술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현존하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문집이다. 그렇기에 조선 순조 34년(1834) 이를 활자로 인쇄, 배포하면서 그 편찬자들인 홍석주(洪奭周)와 서유구(徐有矩)는 각각 계원필경을 가리켜 '동방 문장의 시작'(東方文章之本始)과 '동방 문예의 시작'(東方藝苑之本始)이라고 칭송했다. 이토록 중요한 문헌임에도 아직 국내에서는 그에 대한 온전한 번역본은 물론이고, 각 판본끼리 글자의 같고 다름을 비교하거나 본문 이해에 필요한 사항들을 정리한 교주본(校注本) 하나 없는 실정이다. 국내 학계에서 계원필경 텍스트 연구와 역주(譯注) 작업을 포기하다시피 하는 사이, 계원필경 최초의 교주본이 중국학자에 의해 완성돼 중국의 가장 저명한 출판사에서 최근 나왔다. 베이징에 본사를 둔 중화서국(中華書局)이란 출판사에서 지난 8월에 출간한 '계원필경집교주'(桂苑筆耕集校注) 상ㆍ하 2권이 그것. 이 교주본 발간은 '중국역사문집총간'(中國歷史文集叢刊) 사업 일환으로 기획됐으며, 저자는 현재 난징사범대학 중문계(中文系.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최치원 연구로 지난 99년 난징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당잉핑(黨銀平)이다. 국내 중국어 전문 서점에도 수입되어 판매되기 시작한 이번 교주본은 중국정부가 지원하는 고적 정리 사업비 지원을 받았음을 책 자체에 명시하고 있다. 범례와 당잉핑 교수의 서문에 따르면 이번 교주본은 조선 순조 때 홍석주와 서유구가 활자로 찍어낸 계원필경집을 저본(底本)으로 삼으면서, 조선초기 편찬된 시문집인 동문선(東文選)이나, 1982년 경주최씨 문중에서 펴낸 '국역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 문집'을 비롯한 다양한 판본을 비교해 판본별 글자의 같고 다름을 일일이 밝혔다. 나아가 계원필경 본문 곳곳에는 그 이해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찾아 배치했다. 당 교수는 특히 계원필경에 수록된 각종 시문이 언제 제작되었는지를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 혹은 자치통감(資治通鑒) 같은 각종 문헌기록에서 찾아내 제시했는가 하면,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드러난 새로운 사실까지도 주석(注釋)으로 보충해 넣었다. 국내에서 계원필경 텍스트 연구는 최치원을 중시조로 삼는 경주최씨 문중에서 낸 번역집인 '국역 고운 최치원 선생 문집'이 있으나, 계원필경 수록 작품 전체를 번역한 것도 아닌 데다, 잘못된 번역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개인 연구자가 최치원의 현존 시문 전체를 대상으로 역주작업을 해 나가다가 계원필경을 앞에 두고 포기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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