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가정'이 급격히 흔들리면서 가정의달 풍경도 바뀌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시대에 취업포기·결혼포기·출산포기로 상징되는 이른바 'N포세대'의 비명이 반영된 결과다. 실제 어느새 우리 사회는 1인가구가 2·3·4인가구를 제치고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경북 안동시에 사는 권수찬씨(가명·63) 부부는 올해 어버이날을 괌에서 맞았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큰아들(33)과 아직 취업준비생인 작은아들(28)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본인들이 먼저 떠났다.
서울에서 내려오겠다는 두 아들을 말린 건 물론 선물도, 용돈도 모두 고사했다. 권씨는 "박봉에 시달리고 취업난에 허덕이는 자식들한테 어떻게 또 부담을 주겠느냐"며 "우리 돈을 들여서라도 멀리 떠나주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하다"고 말했다.
어버이날 먼저 만남을 '차단'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취업난·저소득에 힘겨운 자녀들과 달리 과거 고성장 시대에 직장을 다니며 상대적으로 벌어놓은 게 많은 사람들이다. 고령화 시대에 소비력을 바탕으로 젊게 사는 이들은 '꽃중년' '꽃노년'으로도 불린다.
실제 자식세대가 느끼는 부담은 만만치 않다. 최근 취업 포털 잡코리아·알바몬이 직장인·구직자 208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68.1%는 5월 중 가장 부담스러운 기념일로 어버이날을 꼽았다. '선물과 용돈 등 경제적 지출이 크기 때문'(59.9%)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갈수록 세대간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점도 영향을 준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40세 미만 가구주 평균 소득'은 2014년 4191만5000원에서 지난해 4215만원으로 소폭 오르는 데 그쳤다.
반면 부모 세대에 해당하는 '50세 이상 가구주 평균 소득'은 같은 기간 4266만원에서 4567만원으로 증가했다. 70여만원에 불과하던 두 세대간 소득 격차가 2년 만에 350여만원으로 벌어졌다.
부모들도 자식들의 이런 부담을 잘 안다. 퇴직 교사 황혜선씨(64·부산)는 "우리 부모들이야 젊어서 번 돈으로도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지만 자식들은 그렇지 않다"며 "어버이날이라고 챙겨주면 그게 더 마음을 무겁게 한다"고 말했다. 황씨 부부는 지난 4일 두 딸에게 "신경 쓰지 마라"란 말만 남기고 일본 여행을 떠났다.
경남 김해시에 사는 강형식씨(가명·60) 부부는 어버이날 집에 있으면서도 자식들에게 제주도로 떠난다고 거짓말을 했다. 강씨는 "빠듯한 생활로 힘든 걸 뻔히 아는데 괜히 부담 주기 싫다"고 말했다.
'부담 주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합리적이기도 하지만 가족해체 현상의 단면으로 보는 시선도 적잖다. 전문가들은 부모·자식간 만남 자체를 피하기보다는 기념일을 꼭 물질적으로 챙기려는 관념을 줄이라고 조언한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절대적일 거라 믿었던 전통적 가족상(象)이 사회 변화에 따라 바뀌고 있다"며 "가족 구성원 사이 유대관계도 가치관이 변하면서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리 가족 양상과 부모·자식 역할이 변해도 구성원들은 서로 만나야 한다"며 "만남을 꺼리는 데는 사실 경제적 부담 탓이 가장 크다. 물질적 보상을 넘어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