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 과거사진상규명위 발표…관련문서·관계자 진술로 확인
“국가에 의해 가해지는 폭력을 감내해 내면서 자기의 양심과는 어긋난 행동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그 정신적 피해는 상상 이상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지금도 절대로 군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눌러대면서 고문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자 지켜보던 누군가가 제 입에 발을 집어넣었습니다. 제 손가락은 진물이 흘러내리고 피멍이 들었으며 그런 고문은 약 2일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5공화국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당시 정권에 의해 강제징집당한 피해자들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증언한 내용이다. 이처럼 학생운동 세력을 강제 격리시켜 사상 개조와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던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나 승인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13일 강제징집ㆍ녹화사업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전 전 대통령의 지시 여부는 관련 문서를 통해 지시ㆍ승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위원회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1981년 4월 2일 “소요 관련 학생들을 전방부대에 입영 조치하라”는 구두 지시를 당시 주영복 국방부장관에게 하달했고, 국방부차관이 강모 소장을 통해 병무청장에게 전달했다. 이는 보안사 문건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보안사에서 녹화사업 구상녹화사업의 경우 당시 보안사 최경조 대공처장이 대통령의 질책을 받고 녹화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으며, 사업 진행과정에서 정기적으로 청와대에 보고했음을 인정하는 보안사 관계자(대공처장, 심사과장 및 실무자)들의 진술이 있었다. 또 1983년 12월 대통령이 서명한 ‘1984년도 학원 종합대책’ 문서에도 녹화사업 추진 실적이 포함돼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전 전 대통령의 승인이 있었던 것이다. 위원회는 국방부, 내무부, 문교부, 병무청, 치안본부 뿐 아니라 각 대학에 이르기까지 5공정권 및 관계기관이 강제징집을 위해 총동원되었음을 관련 문서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1980년 9월부터 1984년 11월까지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대상자는 각각 1,152명, 1,192명이며, 녹화사업 대상자 중 921명은 강제징집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1988년 국정감사 시 국방부와 보안사는 강제징집 447명, 녹화사업 265명이라고 대상자를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위원회는 당시 학생운동을 비롯한 재야ㆍ민주단체의 거센 비판과 정치적 쟁점화를 우려해 최대한 규모를 줄이려고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소아마비 장애인도 강제징집강제징집은 신체조건과 연령 등 법적 절차와 요건조차 무시한 것이었다. 당시 성균관대 남모씨는 한 쪽 눈의 시력이 없는데도 강제징집됐다가 3개월만에 의병 제대했으며, 서울대 이모씨는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데도 징집됐다. 또 강제징집돼 군 복무 중 사망한 성균관대 이윤성씨는 2대 독자였고, 연세대 정성희씨는 만 19세 이하로 현역 입영 대상이 아니었다. 학생운동과 무관하게 강제 징집된 경우도 확인됐다. 서울시립대 정모씨는 입사원서 접수를 위해 서울 종로3가를 걷던 중 시위 가담자로 오인돼 강제징집됐으며, 연세대 최모씨는 부상자를 교내 보건소로 이송하다가 강제징집의 불운을 맞았다. 국방부는 강제징집된 학생들에 대해 ‘안보현실을 체험토록 한다’는 명목으로 적성이나 특기와 무관하게 최전방에 배치했으며, 병적기록부에 ‘특수지원’이나 ‘특수학변’이란 적색 고무인을 날인해 별도로 신상관리했다. 녹화사업의 대상이 된 학생들은 과거 운동권 가담 활동 내용, 동아리 관련자 등에 대해 강압적인 조사를 받았고, 이후 프락치 활동까지 강요받았다. 특히 동료, 선후배들의 활동사항 진술을 강요받으면서 심한 자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죽음까지 생각하게끔 만든 중대한 위법행위”위원회는 “당사자에게 동료들을 배신해야 한다는 정신적 폐해를 초래했고, 죽음까지 생각하게끔 만든 중대한 위법행위”라고 규정했다. 녹화사업은 고귀한 목숨까지 앗아갔다. 성균관대 이윤성씨는 심사 중 보안부대 영내에서 자살했으며, 서울대 한희철씨는 심사 후 자대복귀 후 자살했으며, 그 외에도 강제징집자 4명이 군 복무 중 자살이나 타살로 사망했다. 녹화사업을 담당했던 보안사 심사과는 서울 을지로 3가 소재 모 아파트를 심사장소로 사용하다가, 조사 대상이 늘어나자 1983년 5월부터는 과천 소재 아파트 두 채를 매입해 사용했다. 또한 각 군에 복무 중인 단기장교 중 고시 출신이나 사회과학 전공자 23명을 차출해 심사장교의 임무를 부여했다. 강제징집은 1980년 77명, 81년 230명, 82년 371명, 83년 461명으로 증가하다가 1984년 13명으로 급감했다. 대학별로는 서울대가 254명으로 가장 많고 고려대 165명, 성균관대 105명, 경북대 37명, 전남대 29명, 강원대 28명 등으로 확인됐다. 강제징집자 가운데 녹화사업에 동원된 인원은 서울대 199명, 고려대 137명, 성균관대 79명, 경북대 30명, 강원대 24명, 전남대 15명 등이다. 당시 강제징집은 △경찰 등 수사기관에 의해 연행된 후 △강제 휴학 △검찰에서 석방되거나 재판받은 직후 △집단적 강제징집 등 방식으로 이뤄졌다. 집단 강제징집은 1981년 ‘무림사건’, ‘야학연합회(동학회)’ 사건(11명), ‘학림사건’(24명), 고려대 ‘문무대사건’(109명), 연세대 교내시위(15명), 1982년 종로 연합가두시위(20명) 등이다. 위원회는 1984년부터 국회, 학원가, 종교단체 등 각계에서 강제징집ㆍ녹화사업의 실체와 사망자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나, 국방부와 보안사는 일부 사망자에 대해 사건 발생 경위를 왜곡하는 등 진실을 밝히지 않는 등 소극적 자세로 일관했음이 이번 조사에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위원회는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 전체 차원의 사과 방안을 마련해야 하며, 관련 피해자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 심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은 피해자 반발과 사망 사고 등이 발생하자 재야와 야당에서 문제를 제기, 정치쟁점화하자 1984년 11월 13일 강제징집이 금지되고, 이어 다음달 19일 보안사 심사과가 해체되면서 녹화사업도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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