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인간의 실존철학과 인생의 정수를 담은 작품이다. 문학이 주는 무게감이 커서 그런 것일까? ‘노인과 바다’가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연극 ‘노인과 바다’의 시작은 왠지 낯설다. 공연은 적막과 고요함으로 펼쳐지리라는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는다. 막이 오름과 동시에 재기 발랄한 청년 한 명이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관객에게 농담을 걸며 유쾌하게 자신의 소개를 한다. 관객과 소통하는 청년의 모습은 신선하고 사랑스럽다. 초라한 행색의 노인 한 명이 성큼성큼 등장한다. 노인은 청년의 수다스러운 모습과는 대비되게 아무 말 없이 엉켜있는 줄을 풀어낸다. 비교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관객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다.
물고기가 되는 관객들, ‘고전의 철학을 맛있게 보다’연극 ‘노인과 바다’는 세심하면서도 유쾌한 연출 기법이 돋보인다. 100분의 시간 동안 소설의 주제와 핵심을 간단하면서도 위트있게 풀어놓는다. 노인이 고기와 혈투를 벌이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극의 중간마다 기발한 유머를 발휘해 관객의 지루함을 달랜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자연스럽게 노인과 팔씨름을 하고 있고, 노인의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가 된다.
관객의 참여가 극이 심각한 장면으로 나아갈 때 융화되지 못해 아쉬웠다. 관객의 참여가 극의 메시지를 또렷하게 전달하는 역할은 분명 크다. 그러나 작품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관객의 참여는 극의 핵심 메시지와는 상관이 없다.
연극 ‘노인과 바다’는 원작의 진중한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다. 연극은 원대한 인간의 꿈과 잔인한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84일 동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노인의 모습은 담담하면서도 슬픔이 묻어나온다. 포기할 줄 모르는 노인의 근성은 후반으로 갈수록 격정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상어 떼와 혈투를 벌이는 노인의 모습은 긴장의 정점을 이룬다. 노인이 잡은 대어가 상어 떼의 습격에 갈기갈기 찢지는 모습은 붉은 색종이가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붉은 색종이는 인공 물고기와 노인의 싸움을 현실감 있게 전달하는 구실을 한다.
쓸쓸함과 당당함을 오가는 배우들의 반전 연기 노인과 청년의 2인이 펼치는 무대는 관객과 배우의 거리를 좁힌다. 등장인물이 적은 만큼 관객이 한 명의 배우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커진다. 노인 역할의 정성희 배우와 청년 역할의 이동준 배우는 각기 다른 매력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노인은 남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당당하고 품위를 잃지 않는다. 아무도 가지 않는 먼 바다에서 큰 고기를 잡는 것은 노인의 원대한 꿈이다.
배우 정성희는 이러한 노인의 열정을 잔잔한 호수처럼 편안하게 그려낸다. 그는 느리지만 힘 있는 발걸음, 미세한 표정과 우렁찬 목소리로 노인의 분위기를 완성한다. 인간인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기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대사에서는 싸한 슬픔이 밀려오게 한다. 그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노인의 꿈과 절망을 표현한다. 어렵게 잡은 고기가 망가진 모습을 보며 이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는 듯 허무의 감정도 오롯이 드러낸다.
이동준 배우는 유쾌함과 격정적인 슬픔을 넘나드는 다양한 매력을 선보였다. 관객을 자연스럽게 연극에 참여하게 만들고 동시에 해설자 역할도 한다. 그는 실시간 중계처럼 노인의 행동을 보며 느낀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노인의 상황을 이해하게 만듦과 동시에 슬픔과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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